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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과 민주주의 계승, 부마의 함성이 남긴 교훈

by buenavibra 2025. 10. 18.

부마민주항쟁, 유신체제의 균열을 열다

 


1979년 가을, 폭발 직전의 한국 사회


1979년의 한국은 유신체제의 강압 아래 있었다. 언론과 정치, 사회 전반이 통제되었고 국민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침묵을 강요받았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대기업 위주로 진행되며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물가는 오르고 서민의 삶은 악화되었으며, YH무역 여성 노동자 사망 사건은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영삼 의원의 제명은 시민들에게 정권의 부패와 폭압을 상징적으로 각인시켰다. 사회 전반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항쟁이 점화되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진 시민의 외침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민주회복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순식간에 도심으로 확산되었고, 노동자와 상인, 주부까지 합세해 수만 명이 거리를 메웠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음료를 건네며 지지했고,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에도 굴하지 않았다. “독재 타도하라”, “부가세 철폐하라”는 구호 속에는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적 불만이 응축되어 있었다. 공화당사와 방송국, 파출소가 시민들의 항의 대상이 되었고, 부산 시내는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 불길은 10월 18일 마산으로 번졌다. 경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는 하루 만에 수천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노동자와 학생, 상인, 주부가 한목소리로 독재 종식을 요구했다. 언론 통제에 대한 분노는 신문사와 방송국으로 향했고, 일부 파출소에서는 독재정권의 상징물이 불태워졌다.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고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이 투입되었고 수많은 시민이 연행되었지만, 항쟁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

부마항쟁은 단순한 지역 소요가 아니라 전국적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학생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며 독재정권에 맞선 것은 4·19혁명 이후 처음이었다. 이 항쟁은 유신체제 내부 균열을 드러내며, 정권 붕괴를 촉발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항쟁이 끝난 지 열흘 뒤,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고, 유신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마항쟁은 권위주의 정권의 종말을 앞당긴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흐름을 바꿨다.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2016년의 촛불집회까지 이어지는 시민 저항의 뿌리가 바로 부마항쟁이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참여로 완성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고, “침묵하지 않는 시민”의 상징이 되었다.

 


항쟁의 기억과 민주주의의 계승

 


부마항쟁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9년 제정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은 당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항쟁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18일은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매년 부산과 창원에서는 추모식과 학술대회가 열리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2025년 10월 열린 46주년 기념식에서 정부는 “부마의 민주정신이 촛불혁명과 오늘의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현재적 과제로 재확인된 것이다. 부마항쟁기념공원과 기록관은 항쟁 참여자들의 구술 자료를 보존하며, 억압에 맞선 시민의 용기를 후대에 전하고 있다.

 


부마의 함성이 남긴 교훈

 


부마민주항쟁은 권위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억눌린 분노가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분출되며,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한 사례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후 등장한 신군부 체제 속에서도 시민의 저항 의식은 꺼지지 않았고, 광주와 서울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불길이 되었다.


오늘날 부마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상징하는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부산과 창원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며, 시민들은 매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한다. 부마의 항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향한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여정을 비추는 등불이다.